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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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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만이 독립의 희망이다.(단재 신채호)
작성자 김석인 등록일 2016-03-27 15:37 조회수 1,424
[일제강점기] 단재 신채호 2부, 역사만이 독립의 희망이다

1905년 11월 18일 덕수궁 중명전, 일제는 대한제국을 향한 침략 야욕을 드러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의 날치기 조약, 을사늑약이 그 시작이었다.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치밀한 전략, 이는 통감부 설치로 이어졌다. 식민지화를 앞당기기 위해 통감부는 역사왜곡에 앞장섰다.
통감부: 대한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일제가 설치한 감독기관
이 시기 편찬된 교과서에서 일제는 조선을 독자적인 역사기원이 불분명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날조와 왜곡으로 우리의 역사는 물론이고 문화까지도 서서히 잠식해가던 일제의 식민사관, 조선은 점점 그 뿌리를 잃은채 표류하고 있었다.
초등대동역사: 대한제국의 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일제 통감부가 발행한 한말의 국사 교과서

그때 다행히 그가 있었다.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선각자, 그래서 이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지식인. 그가 바로 단재 신채호다. 그는 국치를 씻고 우리 조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교과서 격인 독사신론을 썼다.
내가 요즘 각 학교 교과용 역사를 보건대 가치 있는 역사가 거의 없도다
제1장을 펼치면 우리 민족이 지나족의 일부인 듯 하며
제2장을 펼치면 또 선비족인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전편을 다 읽고 나면 어느 때는 말갈족의 일부인 듯하다가 어느 때는 일본족의 일부인 듯 하니...

한국 고대 존재했던 역사를 찾아서 체계화함으로써 민족이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을 하게 된 것이죠.
사대주의적 역사에 대한 비판을 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혁명적인 글입니다.
단재를 민족주의적 사학의 수립자 또는 근대사학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부여하는데 아무도 이론이 없을 것입니다.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고 역사를 버리면 나라도 없다고 단언한 단재 신채호. 그에게서 역사는 곧 민족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키워드였고 곧 독립의 희망이었다.

한반도 서남부의 중심내륙지역인 청주를 둘러싸고 있는 충청북도 청원군. 이곳의 금난부는 노령산맥 줄기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있으며 북부와 서부에는 차령산맥 줄기의 낮은 산지들이 분지를 이루어 충북 최대의 곡창지대를 품은 땅이다. 맑고 시원함의 근원이라는 뜻을 지닌 청원군. 지명처럼 청정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맑은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분일까? 이곳은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위암 손병희, 단재 신채호, 청암 한봉수, 예관 신규식, 운재 신석구, 청암 권병도, 동호 신옹식 등이 이곳 출신이다. 특히 3.1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됐던 충북은 민족대표 33인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의사를 세계에 알린 3.1운동. 민족자주의 기치를 드높였던 선혈들의 높은 뜻이 이곳에 남아있다.

아버지를 잃은 뒤 청원군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낸 신채호. 그가 보여준 삶은 청원의 맑은 기운을 그대로 닮았다.
청원군 미원에서 청주로 향하는 25번 국도의 다른 이름은 단재로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오지 중의 오지마을인 귀래리에 도착한다. 광해군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선비 신유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숨쉬는 마을 귀랠. 250년이 지난 뒤에 단재가 이곳으로 옮겨살게 된 것은 과연 우연일까?

충북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 귀래리는 고드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곳 고드미 마을은 한번 옳다고 생각한 것은 절대 굽히지 않았던 단재와 어딘지 닮아있다.
김영미 ㅣ 청원군 문화해설사: 고드미라는 마을 이름은 ‘대쪽같이 곧다’라는 말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신채호가 8세에 할아버지의 고향인 낭성면으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성균관에 입학하기 전인 18세까지 낭성면에서 살았습니다.

소년 신채호를 키운 땅, 고드미. 이곳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도종환 시인의 고드마 마을에서 라는 시에서 소개되면서부터다.
고두미 마을에서 -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도종환)
눈 녹이 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 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고령 신씨 집성촌이었던 고드미 마을. 이곳엔 단재가 가족들과 함께 살던 집터가 남아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충청북도 기념물 90호로 지정된 사당과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산동산재로 이름을 알렸던 단재가 8살때 책거리 기념으로 심은 모과나무도 아직 마을을 지키고 있다. 소년 신채호는 이 나무를 심으면서 무엇을 다짐했을까?

신채호를 키워낸 고향땅에는 단재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김영미 ㅣ 청원군 문화해설사: 신채호가 물을 얼굴에 찍어 바르는 방법으로 꼿꼿이 서서 세수를 했다고 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도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신채호의 꼿꼿한 절개와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일제에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아서 세수마저도 서서했다는 단재 신채호. 옷이 젖는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굳은 절개를 지닌 시대정신이었다.

단재기념관
지난 2003년 고드미에는 신채호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들어섰다. 그의 독립정신과 역사관을 기리는 산교육전, 이곳에선 민중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의 신문논설은 물론이고 역사에 주목했던 사학자 단재를 만날 수 있다.

또한 고단한 삶을 살았던 그의 손 때묻은 유물들도 전시되어 있다. 일제 탄압과 가난도 막지 못했던 불굴의 독립정신. 역사속에서 독립의 방법을 찾고자 했던 단재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낸 학자였다.

조국의 씩씩한 재건을 위해 절치부심했던 피끓는 지식인 단재 신채호. 그는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나던 1910년 망명길에 오른다. 기약없는 길을 떠나온 31살의 망명객, 그의 봇짐에는 낡은 역사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이는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까지를 담은 역사서 동사강목이었다.
동사강목: 안정복이 지은 역사책으로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기록

동사강목은 안정복이 지은 역사서로 역사가의 중요한 원칙을 주지하고 있다. 첫째, 계통을 밝힐 것. 둘째, 찬탈자와 반역자를 가릴 것, 셋째, 시비를 바르게 내릴 것, 넷째, 충절을 높이 평가할 것, 다섯째, 법제를 상세히 살필 것 등이다.

중국 만주
신채호가 망명길에 나선 배경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역사 공부에 대한 포부도 있었다. 그의 행보는 자연히 만주로 이어졌다. 우리 민족의 찬란하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꽃 피운 땅, 만주의 역사를 되찾는 작업이었다. 단재는 만주를 지배한 부여족이 분명한 우리 민족이고 따라서 만주는 우리 영토임을 주장했다.
김관태 ㅣ 전 국제평화대학원 부총장: 신채호가 1910년 망명 후에 만주를 돌아보면서 우리 조상의 발자취를 직접 대하게 됩니다. 단군 이래 부여족의 삶의 터전이 백두산 고원에서 일어나 압록강 줄기로 내려와 서쪽은 요동, 남쪽은 평양, 황해도에 걸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기간에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는 만주 지역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만주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 고분 터
발길이 닿는 곳, 시선이 닿는 곳 어느 하나 고구려의 옛 땅이 아닌 곳이 없는 지안. 이곳은 1,300여년전만 해도 고구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웅장했던 고구려의 전성기를 담고있는 만주땅, 신채호는 이 땅을 바라보면서 역사 뒷칸에 가려져있던 강대한 우리 역사를 복원했다.

단재 역사 연구야말로 유적 답사와 문헌의 비교 고찰에 의한 확고한 실증에 기반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의 중심에 만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단재는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판했다. 우리의 땅이었던 만주를 제외하고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재는 지안현을 한번 돌아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신라, 고구려, 백제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기술한 역사서
정영순 교수 ㅣ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동안에 숨겨져 있던 사료를 발굴해서 문헌사에만 의존하지 않고 문헌 고증학적으로 과학적인 자료를 역사적인 사실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를 비교, 분석하는 작업도 했습니다. 위서, 거짓된 역사서를 바로 잡는 역할을 하면서 숨겨져 있는 역사서를 찾는 직업을 많이 했습니다.

사대주의에 물들지 않고 식민사관의 덫칠을 벗겨낸 우리 고대사. 이는 종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역사를 정확히 알고있던 신채호는 우리의 고대사와 만주에서 자랑스런 만주의 역사를 찾아냈다. 민족정기가 시들지 않게 하는 일, 이는 신채호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역사속에서 암울한 현실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확고한 역사의식을 담은 책, 조선상고사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상고사: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사를 단행본으로 출간한 책.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의 역사를 서술
김호일 명예교수 ㅣ 중앙대학교: 조선상고사는 신채호가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조선사를 다 집필하지 못하고 조선상고시대 부분, 수두시대, 즉 단군으로부터 출발해서 삼국시대인 고구려, 백제, 신라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것입니다.

나중에 일어난 왕조가 앞의 왕조를 미워하여 고려가 일어서매 신라의 역사가 볼 것 없게 되었으며 이씨 조선이 들어서매 고려의 역사가 볼 것 없게 되었다. 이처럼 현재로써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번번이 말살하려고만 하였으니 역사에 쓰일 재료가 빈약해진 것이다
조선상고사 중 -
김호일 명예교수 ㅣ 중앙대학교: 혹 붙은 역사, 잘못되고 망가진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중국 학자들이 잘못 보았던 것, 일본 학자들이 완전히 날조했던 것, 이러한 것들은 전부 다 없애 버리고 진정한 우리의 한국사를 정립하려고 했던 의식이 바로 조선상고사에 담겨 있습니다.

망명객 신채호의 여정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진다. 이때 단재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한다. 바로 한일강제병탄. 형용할 수 없는 분노때문이었을까? 신채호는 자신의 주특기인 언론활동을 활발하게 재개한다.

그는 해조신문을 복간하고 청구신문 발행에 참가한다.그가 만든 신문은 러시아와 만주 등지에 흩어져있는 우리 민족들간의 가교역할을 한다. 또한 교민단체 권업회의 기관지인 권업신문의 주필을 맡기도 했다.
해조신문: 대한제국 말기에 러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한글 신문
청구신보: 고려족 중앙 총회의 기관지
권업신문: 교민 단체인 권업회의 기관지

김상웅 ㅣ 전 독립기념관장: 우리 교포들이 만든 해조신문, 그리고 권업신문 이 두 신문의 주필을 맡아서 여전히 우리 교포의 교육, 계몽, 세계 사조 ‘왜 우리가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이런 역할을 했습니다. 혹독한 추위, 하루 한 끼도 먹기 어려웠던 굶주림, 이때 신채호가 여러 가지 심한 병을 얻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붓을 꺽지 않고 정론을 펴면서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지독한 생활고는 독립운동가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일이었지만 생활고에 병고까지 겹쳐 신채호는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고단한 망명생활은 상하이로 이어진다. 동지들의 도움으로 몸을 추스린 단재는 뜻을 모아 인재를 육성하는 학교를 연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미래를 도모하는 유일한 길은 교육에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역시 배워야했다. 영어 원서로 된 역사서를 읽고싶은 욕심에 단재는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틈틈히 독학으로 공부했던 터라 번역은 상당수준이었지만 늘 발음이 문제였다. 스승을 자처한 친구들은 그의 발음을 고쳐주려 노력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렸다.
“네이그흐바우어”
“그게 아닐세, 묵음이 들어가 있어서 네이버라고 읽어야 하네”
발음은 그들만의 어법일 뿐이라며 자신만의 방법을 고수했던 단재다.
김호일 명예교수 ㅣ 중앙대학교: 네이버를 네이그흐바우어로 읽어도 이웃이라는 말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연구한 것을 고집하는, 쉽게 이야기하면 독선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주장이 강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15년 37살의 단재는 베이징으로 간다. 글쓰는 것과 독립운동만이 전부였던 망명객 신채호. 그는 국경의 유력한 신문인 북경중화신보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단재의 논설로 발행부수가 늘어나 후한 원고료를 받던 시절, 단재는 돌연 집필을 거부한다. 이는 그가 쓴 논설 가운데 어조사에 불과한 의자를 신문사에서 마음대로 고쳤기 때문이었다. 사장까지 직접 찾아와 사과했지만 요지부동이었던 신채호. 당장 생계가 끊길 지경이었어도 한국인을 무시하는 중국인의 태도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단재에게 있어 민족적 자존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이호룡 책임연구원 ㅣ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채호가 노발대발해서 북경중화신보에 글을 게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 글에 대한 자부심도 존재하지만 신채호의 자괴감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외에 망명 와서까지 외국 신문에 글을 쓰는 자신에 대한 회의 내지 자괴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1918년 해외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민족 최초의 독립선언문인 무오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무오독립선언문: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춰 조국독립을 요구한 독립선언서로, 신채호, 안창호 등 39명이 서명

독립선언문과 고종의 갑작스런 서거소식은 조선민족을 깨우는 기폭제가 된다.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의 궐기, 이 소식을 들은 단재는 감격에 사로잡힌다.
3.1운동: 1919년 3월 1일 기하여 일어난 범민족 항일독립운동. 집회인수 202만여 명, 사상자 2만여 명, 구속된 자가 4만 700여 명으로 추정
하지만 그것도 잠시 3.1운동으로 2만여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일제의 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총과 칼을 든 적들에게 평화적인 방법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무오독립선언과 3.1운동은 마침내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안으로 전개되었다. 임시정부수립 29인 중에 한명이었던 신채호. 임시정부도 정부의 한 형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외교론이 무게를 두었다.

하지만 단재는 외교에 의지해 독립을 이루려 하는 것은 일본을 대신해 다른 나라에게 조국을 맡기는 격이라고 여겼다. 초지일관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론을 주장했던 단재, 그로써는 임시정부의 이러한 노선과 뜻을 같이하기는 어려웠다.

임시정부를 박차고 나온 신채호는 또다시 언론투쟁을 한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대응하는 신대한을 창간한 단재는 일제와 싸우는 한편 임시정부를 비판하는데도 적지않은 지면을 할애했다. 강력한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단재는 그 정당성을 글로 써서 천명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독립투사들의 행동지침서로 통했던 조선혁명선언이다.
신대한: 신채호가 창간한 순 한글 신문으로,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비판하고 무장투쟁을 강조함
정영순 교수 ㅣ 한국학중앙연구원: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의 방향이 굉장히 무식한 방법이다라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무장투쟁을 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는데 신채호는 학자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문장을 통해서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고 그것이 빛을 발할 수 잇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선혁명선언서에 단재는 외교와 준비라는 허점투성이의 독립운동을 버리고 민족혁명을 도모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이족통치와 특권계급을 없애고 고유한 조선, 자유로운 조선 민중을 건설할 것을 제시했다.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정확하게 제시한 선언문은 의열단의 의식을 한껏 고취시켰다. 이로인해 이들의 활동은 한층 더 치열하게 전개됐고 일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조선혁명선언: 1923년 1월 의열단의 요청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선언서. 폭력을 혁명의 유일한 무기라고 선언하고 불합리한 제도를 개조한다는 내용

조선혁명선언에서 밝힌 바대로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그가 지향했던 무정부주의 운동은 나라를 뺏긴 국민 모두 힘을 모아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것이다. 이에 단재는 중국, 일본, 조선, 대만 등 6개국 무정부주의자들과 만나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을 결성한다.

항일투쟁의 새로운 출구가 된 무정부주의 운동. 하지만 자금이 문제였다. 단재는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고 일제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한 폭탄제조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당시 뜻을 같이했던 이는 북경우체국에 근무하는 대만사람 임병훈. 단재는 그와 함께 각국의 어음을 위조 인쇄해 막대한 자금을 만들기로 한다. 계획은 위조어음을 일본, 조선, 대만 등 우체국에 발송하고 현지에서 다시 찾는 것이었다.

유명원이라는 가명을 쓰며 중국인으로 변장한 신채호는 배에 올랐다. 하지만 목적지인 지룽항에 닿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일본 경찰들에 의해 단재는 체포되고 만다.
중국인으로 변장한 신채호,
지룽항에서 붙잡힘

체포된지 2년 10일째인 1930년 5월 9일, 신채호는 뤼순감옥으로 이감됐다. 유가증권 위조와 사기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의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은 후였다. 단재는 중죄인으로 취급되어 독방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높았던 신채호를 일제가 순순히 놓아줄리가 없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하지만 단재는 언제나 그랬듯이 당당했다. 그의 의기만큼은 갇혀있지 않았다.

감옥에서 생활은 참담했다. 심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했기 때문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에도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고된 노역 중에도 10분간의 휴식시간을 쪼개 책을 읽었던 단재, 그는 틈틈히 출감 후에 쓸 책들에 대한 구상에도 몰두했다. 그가 쓰고자 계획했던 책은 역사서였다.

하지만 오랜 망명생활과 혹독한 추위에 그의 몸은 휘청거렸다. 건강이 악화되자 일제는 병보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김호일 명예교수 ㅣ 중앙대학교: 병보석을 하려면 보석금을 내야 합니다. 보석금을 모았는데 일정한 액수가 되지 않아서 당시 친일파였던 돈 많은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친일파의 돈을 가지고 내가 나가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신채호의 고집이면서 지조입니다.

불의와는 한치의 타협도 하지 않은채 험난한 세월을 살아온 단재다운 선택이었다. 단재가 수감된 뒤 그가 전에 썼던 글들은 국내 한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의 글들이 뜨거운 반응을 얻자 국내 신문사의 기자는 뤼순감옥을 찾는다. 15분간의 짧은 만남에 단재는 면회를 온 기자를 통해서 자신의 글이 연재되고 있음을 전해듣는다. 그는 큰 노력을 쏟았지만 아직은 완벽한 연구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조선사의 연재 중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건강하게 세상에 나가게 된다면 자신있게 다시 발표하겠다고 약속한다.

미완성의 역사서 그것이 지금의 조선상고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순간에도 역사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던 사학자 단재가 우리에게 남긴 유언이다.
아직 조국이 독립한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고 또 해야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출옥을 2년 8개월 앞둔 36년 2월 18일, 단재는 쓰러지고 말았다. 사흘 뒤 단재는 지켜보는 이 없는 싸늘한 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역사 연구에 몰두했던 사학자 단재 신채호. 그에게 역사는 곧 독립의 희망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2,000만 동포의 귀에 애국이란 말이 생생하게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오직 역사로 할 뿐이니라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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