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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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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중근장군 동양평화운동전개
작성자 박정부 등록일 2015-06-22 15:25 조회수 1,432
첨부파일 신동양평화운동취지-배경-2.hwp(518Kb)신동양평화운동실천과제-3.hwp(247Kb)
동양평화운동 취지문
■ 안중근의사에 대한 일본총리-관반장관 릴레리 비하망언 과 일본정부가 안중근의사를 범죄자 로 규정 하고 “일본 정부 관료들의 계속되는 도발적 언동은 우리 국민이 좌시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가증스러운 준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냐”면서 “일본의 총리를 비롯하여 관방장관이 뱉어내는 일련의 망언은 일제강점기 당신들 선조들이 자행했던 것처럼, 우리 국가를 모독하고, 안중근 의사를 모욕하고, 국민의 자존심마저 유린하는 만행임을 명심해야 할것이다특히"안중근은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 아베 총리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공식 답변을 내놨습니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정상국가화 하려는 시도가 주변국의 우려 속에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재무장과 패권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력인사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2차대전의 만행을 정당화 하는 발언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일본 정부는 4일 "안중근은 내각총리대신이나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인물로 알고 있다"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총리대신 명의의 답변을 내각회의에서 결정해 중의원에 제출했습니다.
아베 내각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이 정부의 공식 견해인지, 일본 정부의 인식은 어떤 것인지를 묻는 신당대지 소속 스즈키 다카코(鈴木貴子) 중의원의 질의에 이같이 답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히로부미는 한국인들과 아시아 인민들에게는 침략과 가해의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1905년 특명전권대사로 조선 땅을 밟은 뒤 을사늑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이어 초대 통감을 부임해 내정에 대한 권한도 박탈했고 고종을 가제로 퇴위 시켰습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해 식민지로 삼은 것은 1910년이지만 이토가 살아있을 때 사실상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지난 해에도 일본정부 대변인이 “안중근은 범죄자”라며 폭언을 했습니다. 2013년 6월 한중 정상회담 논의에 따라 안 의사의 의거 현장인 하얼빈 역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는 움직임을 비난하면서 그런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국 외교부는 “안중근 의사는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저명한 항일 인사”라며 “일본 군국주의가 저지른 역사적 범행을 일본은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 식민지배에 파열구를 내고, 조선을 넘어 피식민지 국가 인민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안겨준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 2월 14일입다. 발렌타인 데이로만 기억되는 2월 14일, 청년들은 달콤하지만은 않은 역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 한일합병이 된 1910년부터 조선 여성을 일본으로 팔아넘겨 매춘행위를 시키는 일이 행해졌다. 1932년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고 일본군의 강간행위가 빈발하자 그 대책으로 오카무라 야스지 중장은 나가사키의 지사에게 군대위안부 유치를 요청했다. 그 후 1937년 난징 대학살 사건 때 일본군이 일반시민을 강간하는 포악행위가 드러났으며,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종군위안부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 여성이 전통적인 유교교육 등으로 성병의 위험이 없으리라는 판단으로 조선 여성을 종군위안부의 적절한 대상으로 정했다. 위안부들은 월 3회 가량 성병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았고 외출 등의 사적인 행동은 엄하게 규제되었다. 위안부에는 매춘업을 하던 일본인 여성도 있었으나 이들은 돈을 선불받고 그 돈을 갚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인 위안부는 "흰밥을 배불리 먹고 돈을 번다"는 말에 속아서 갔거나 강제로 끌려간 나이 어린 미혼여성으로 하루 30~10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하는 육체적 고통과 수치심에 많은 수가 자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안부에대한 반성과 배상 문제를 해결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대한민국 국민은 지난 과거를 잊지 말고
역사교훈을 토대로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한. 중. 일 전쟁 없는
동북아 평화가 필연적으로 실현되기 위하여 동양평화운동이 필수요건이다.

■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 필연성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 (Корея! Ура!)" (한국 만세라는 뜻)라고 크게 외쳤다. 안중근은 일본 정부에 넘겨져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과정에서 재판소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를 죽인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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