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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평해전관련
작성자 222 기 박상회 등록일 2015-07-09 11:27 조회수 857

저는 어제 연평해전을 보며 적이 전저 쏘지 않으면 쏘지 말라는 명령때문에 북괴 군함이 NLL을 넘어 왔음에도 쏘지 못하다가 적의 기습 포격에 당하는 우리 전함 장병들의 피해와 그 와중에도 끝까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적에게 피해를 주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적시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퇴각하는 우리 함정에 허탈함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여기 오늘 그군함에서 위생병 임무를 하다 숨진 병사를 치료했던 군의관의 글을 보고 다시금 고 우리의 토치자들의 잘못을 다시금 느끼며 윤영하(대위*소령으로추서)선장을 비롯한 전사자들에게 진심어린 명복을 빌며 다시금 이런 나라를 위기에 처하게한 위정자가 없길 바라는 바입니다.

**하고픈 말이 많지만 아래 글들로 대신합니다.**

<박상회>



저는 연평해전 박동혁 병장의 주치의였습니다

[중앙일보] 2015.07.09 00:31


장준봉
삼성항미나외과 원장
전 국군수도통합병원 군의관
아직 영화 ‘연평해전’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그동안 망설였다. 13년 전 당시 국군수도통합병원 군의관이었던 나는 연평해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주치의로서 그 영화를 보면 그때의 안타까움, 슬픔, 고통, 절망이 떠오를 것 같기 때문이다.

 2002년 6월 29일 퇴근 무렵이었다. 수도병원은 연평해역에서 일어난 교전으로 비상이 걸렸다. 모두 긴장감에 휩싸여 응급실로 달려갔다. 얼마나 다쳤을까? 부상자는 몇 명인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TV에 보도되는 속보로 사태의 심각성을 어렴풋이 짐작할 정도였다. 드디어 첫 번째 헬기가 도착했다. 군의관들은 잠시 후 허탈감에 빠졌다. 대부분의 장병들이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가벼운 부상자가 대부분이었다. 많은 군의관은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하지만 두 번째 헬기의 상황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전쟁영화에서나 봤던 포탄을 맞고 사경을 헤매는 처참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내가 외과 당직 군의관이어서 그랬을까. 수많은 부상 장병 중 박동혁 병장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박 병장은 의식은 물론 혈압도 잡히지 않았다. 복강 내 출혈로 인해 배는 남산만 하게 불러온 상태였고 온몸에 파편이 박혀 있었다. 초응급 상황이었다. 기도 확보, 호흡, 순환 등 응급조치를 실시하고 바로 수술방으로 향했다.

그날은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환자를 수술방에서도, 마취과 군의관도 예외적으로 묵인해줬다. 수술은 엄청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배 속은 출혈이 심해 시야를 확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장은 파편에 손상돼 완전히 노출돼 있었고 대장과 소장으로 혈류를 공급하는 주요 혈관이 터져 피가 펌프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수혈과 수액 공급, 그리고 주요 혈관의 지혈, 장의 절제가 이루어졌다. 소장과 대장의 일부분은 이미 괴사된 상태였다. 인공항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에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복부 수술을 마친 후 정형외과 수술로 이어졌다. 파편으로 인해 다리의 근육 및 혈관도 많이 다친 상태였다.

 수술 후 치료를 하면서 박 병장이 의무병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괴롭혔다. 참수리 357호에 내가 탔다면 너처럼 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 수도 없이 던졌다. 그만큼 박 병장의 상태는 처절했다. 온몸에 박힌 수십 개의 파편은 그가 자기 목숨을 걸고 함정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부상자들을 돌봤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수술 방에선 긴박감이 압도했다면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는 위중함이 나를 짓눌렀다. 총탄에 맞은 다리 부상이 해결되지 않았다. 절단을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에 직면했고, 박 병장은 결국 다리 한쪽을 잃었다. 그의 부모님께서 가장 안타깝게 여겼던 부분이다. 일반병실로 옮겨졌을 때 박 병장의 실제 음성을 마침내 들을 수 있었다. “장준봉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의 첫마디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아픈 박 병장 앞에서 애써 태연한 척하며 얼른 병실을 나와 버렸다. 그가 전사하기 전에 잠시라도 의식을 회복하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를 치료하면서 나에게 제일 힘이 되었던 것은 박 병장의 삶에 대한 의지였다. 의료진은 그 힘으로 버틴다. 그러나 그 의지마저도 소용없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돌이켜 보면 주치의로서 그때의 상실감이 제일 컸던 것 같다. 그 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차라리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었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월 대보름 전날이었다. 그를 보내고 난 후 나는 녹초가 되어버렸다. 알 수 없는 열과 기침으로 폐렴 진단을 받았다. 살아 있는 나를 원망하는 듯했다. 내 마음이 이러한데 박 병장 부모님의 슬픔과 고통은 어떠했겠는가. 나는 감히 뭐라 위로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침묵했다.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나니 허점이 보였다. 나의 손으로 수술하고 나의 입으로 사망 선언을 했다. 그간 수많은 수술 환자와 운명을 달리하는 이들을 경험했지만 그토록 마음이 무거웠던 적은 없었다. 그가 국가를 위해 바친 헌신적인 자세 때문이었을까. 그를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을까. 허탈감과 죄의식이 그 뒤에도 계속 마음을 짓눌렀다.

 빛은 늘 세상을 비추고 있지만 우리가 밟고 있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으로 시간은 흐르고 밤낮이 바뀐다. 사람들이 잠시 보지 못했을

뿐 진실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박 병장 등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희생이 재조명되고 있다. 순직 처리된 이들을 전사자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이제 그동안 짓눌렸던 마음을 떨쳐버리고 영화를 보려고 한다.

 영화를 보면 꼭 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 박 병장의 부모님이다. 부모님을 만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머님·아버님, 동혁군을 살려내지 못해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동혁군의 명예가 분명 회복되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혁아, 나를 용서해라.”


장준봉 삼성항미나외과 원장 전 국군수도통합병원 군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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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 시사회를 보고서 역사 앞에 고발한다

- 愚羊 -

얼마 전에 영화 ‘명랑해전’이 관람객 14백만 명이란 흥행 기록을 했지만 이번 영화 ‘연평해전’은 ‘海戰’이란 점에서 유사하지만 다른 점은 前者는 약 500년 전의 역사상의 얘기인 반면 後者는 불과 13년 전 얘기 일 뿐 아니라 특히 다른 점은 ‘명랑해전’의 경우 열세의 전력으로 세계 해전 역사 상 유례가 없는 이순신 장군이 大勝한 海戰이라면, ‘연평해전’은 3년 전에 있은 ‘제1차 연평해전’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반면 이 영화의 무대인 제2차 ‘연평해전’에서는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 정장을 포함한 6명의 전사자와 18명의 부상자를 낳았을 뿐 아니라 고속정 마져 침몰한 불행한 역사이기에 이를 영화하기란 쉽지 않으리란 생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사회장을 찾았다.

더구나 이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영화관련 재벌회사와는 거리가 먼 7,000 여명이라는 국민들의 클라우드 펀딩과 중소기업은행의 후원으로 제작중단 위기를 벗어나 난산한 영화이기에 더더욱 관심의 대상이었다.

펀딩 참여로 난생 처음 초대받은 시사회장인 코액스 메가박스에서 좌석권과 포스타를 받고 상영관에 들어서니 머리가 희연 60대 이상의 노년층도 눈에 많이 띠지만 예상 외로 3/4 가량은 20대를 포함한 중장년층이라서 젊은이들에 대한 시국관에 의문을 가졌던 나로서는 흐뭇한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상영 전에 주연급 배우들이 관중들의 많은 박수와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등장하여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연이 막이 오른 영화는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영화를 평할 자격이 없는 문외한이지만 참수리호에 새로 보직을 받은 정장 윤영하 대위와 의무병 박동혁 상병이 참수리호 기간병들의 텃세에 고전을 면하지 못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 시나리오는 어느새 피보다 진한 전우애로 월드컵 4강 신화와 함께 하나가 된다.

북한의 무전감청으로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는데도 상부의 묵살로 참수리호는 이를 모른채 출동한다.

이어서 전개되는 실전 장면은 의도적으로 탱크포로 보강 무장한 북한 경비정으로부터 조타실 함교가 불의의 근접 포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실제 전투와 똑 같은 30여 분 간 정장(艇長)을 포함한 장병들이 적 공격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사투를 벌린다. 이 처참한 장면에 손수건이 몇 번을 안경을 헤집었는지 모른다. 이 영화를 아들을 잃은 부모나 남편을 잃은 아내가 보면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특히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같은 선배 해군 장교 출신인 윤영하 대위의 부친이 벽에 걸린 아들의 하얀 해군 대위의 정장을 살아있는 아들인양 껴안을 때 그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가고 힘없이 축 쳐진 허물처럼 가슴에 안기는 장면을 보고서는 왈칵하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흘린 눈물은 아들 같은 젊은 장병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애통해서 흘린 눈물인 동시에 분노의 눈물이었다.

나는 내가 흘린 분노의 눈물은 월드컵 열풍에 잊혀진 6명의 해군 전사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기에 몇 가지를 역사의 이름으로 고발하고자 한다.

첫째 6명의 전사자들은 모두 한 결 같이 서민 집안 출신이다. 군 복무가 의무제인 대한민국에서 전 현직 대통령이나 장차관이나 국회의원이나 서울 시장 아들이나, 명문 학교 출신은 다 어디가고 각자 어려운 집안을 지켜야 할 대들보인 이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는가?

이 나라의 노블리제 오블리쥬는 어디로 실종되었는가?
나는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감상문을 한마디 적는 종이에 “이 나라는 언제까지나 민초들이 지켜야 하는가?”라고 적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연평해전’에서 북한에게 당한 것이 김대중 대통령의 4대 교전수칙 때문이 아닌지를 밝혀야 한다.


제1연평해전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1.북방한계선을 지키고 2.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

3.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 것 4.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 것으로 이루어진 4대 교전 수칙을 지시함에 따라 해군은 ‘밀어내기’로 불리는 차단기동 개념을 도입했다.


적이 총칼을 가지고 월경을 했는데 아군은 총칼 대신 몸으로 적을 밀어내라니 이게 닭싸움인가? 세상에 이런 교전수칙이 어디 있는가? 경고방송을 1차 했는데 퇴각하지 않는 월경 북한함정을 선제 사격하는 것이 당연한데 이를 못하게 한 점과, 3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해군 함정이 적함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데 영공을 지키는 공군력이 적함을 공격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출격하지 않은 것이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라고 한 교전수칙 때문이 아닌가?

이런 수칙을 만든 국군 통수권자와 이를 예하 부대에 하달한 국방장관 이하 명령계통의 지휘관들의 책임 유무를 밝히기 위해 ‘세월호 특별법’ 보다 앞서 ‘연평해전 진상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연평해전 특별법’을 국회가 만들어야 했지 않은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행하라고 이 영화는 큰 소리로 항변하고 있다.

셋째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국군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 만에 여는 등 늦장 대응을 했을 뿐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의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도 우발적 충돌로 결론내고, 같은 내용의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만일 영화에서와 같이 북한의 통신감청에서 이상 징후를 포착한 것이 사실인지 또 북한의 선제-기습-조준사격이라는 명백한 군사도발행위를 감추고 왜곡시켜 이를 우발로 변조시켰는지 조사해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남의 집에 들어와 나가라는 주인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 고의 이지 이게 우발이란 말인가? 이게 ‘국가안전 보장회의’인가 ‘국가위해(危害)조장회의’인지 6명의 넋의 물음에 당시 안보 라인의 김동신 국방부장관,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특보, 신건 국가정보원장 등은 답해야 할 것이다.

넷째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을 뿐 아니라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6월 30일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國喪 중이나 마찬가지인데 국군 통수권자가 빨간 넥타이를 매고 부인 이휘호 여사와 함께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다. 교전 이틀 후인 7월 1일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조차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하여 이한동 국무총리, 김동신 국방부장관, 이남신 합참의장 등 내각과 군의 핵심 인사들마저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만 보였다.


세월호 참사의 현장인 팽목항을 박근혜 대통령은 2번이나 방문하였고 유족들의 반대로 분향도 하지 못했다. 국토방위가 아니라 수학여행 중 사망한 참사인데도 시청 앞에 마련된 분향소는 7개월 이상 설치되었다. 그러나 연평해전 경우는 일반인 분향소는 설치되지도 않았고 현장 방문은커녕 영결식에도 그림자도 안 비친 대통령을 포함하여 이런 사실에 침목을 지킨 여야 정치인들과 언론을 역사 앞에 고발한다.

다섯째로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이다.

제2 연평해전 유족은 3천100만~8천100만원의 일시금을 받은 반면 세월호 특별법에 의해 세월호 사고 희생자(304명) 1인당 배상금과 위로지원금으로 단원고 학생(250명)은 평균 7억2천여만원, 교사(11명)는 10억6천여만원이 지급될 것으로 추산된다.

보상금의 과다의 문제에 앞서 이 나라를 지탱하는 국민들이 공유하는 가치관은 민주주의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다. 위의 6ㆍ25 전쟁 전사자와 연평해전 전사자와 세월호 사고 희생자의 보상금 수준을 보고 과연 자라는 세대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러한 법을 만든 국회의원들에게 묻는다.

끝으로 세월호 유족들에 비하여 연평해전 유족들은 집단적인 제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고 한상국 중사의 부인의 경우 울분을 못 참아 이것이 나라인가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한마디로 너무 착한 유족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새삼 인식해야 한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어 우는 아기에게만 젖을 주는 나라가 과연 건전한 나라인지 이 영화는 묻고 있다.
영화는 엔딩에서 ‘우리는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뒤에 숨은 뜻은 정치인, 군인, 언론인을 포함한 전 국민에게 대한민국이 지금껏 발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과오를 직시하고 이를 과감히 개선하여 통일 된 건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할 것을 잊지 말라는 6명의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피맺힌 소리를 이 영화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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